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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당 평론

<선무당 평론> 설리는 누가 죽였는가!

<선무당 평론> 설리는 누가 죽였는가!

 

25. 가장 아름다운 청춘이 갔다. 빛나는 10대를 입시지옥에 갇혀 살아야하는 한국에서 20대는 청춘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시기다. 그런 그가 떠났다.

 

우리는 연예인을 잘 안다고 믿는다. 유재석을 잘 알고, 아이유를 잘 안다고 믿는다. 매일 만나는 주변사람도 잘 모르면서, TV 화면에 비추는 그들은 족집게 무당처럼 안다고 믿는다. 화면에서 자주 보니 친근하다고 느끼는 건 좋다. TV에서 웃으면 기분 좋고, TV에서 울면 슬프다고 느껴도 좋다. 그러나 그건 연기일 뿐, 우린 그들을 전혀 모른다. 그러기에 카더라~’ 소식에 귀가 번쩍하는 것이다.

 

파편적이고, 지엽적인 정보.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도 아주 과감하고, 단호하게 그들을 평가한다. 안재현은 이것이 문제, 구혜선은 저것이 문제. 이렇게 판단한다. 대중은 내용의 1%도 모르면서, 마치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 듯 논평하고 결론 내린다. 그것도 매우 성급하고,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대중의 심리를 잘 아는 이들은 영악하게 악용하기도 한다.

 

설리는 노브라 논쟁으로 유명하다. 당당한 그녀의 언행은 거센 반발을 불렀다. 한국에선 지나치게 민감하게 생각하는 성문제와 연결되니 온갖 논란(비난)이 생겨난다. 동굴의 우상이 떠오른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상. 동굴 밖을 본 이가 동굴로 들어와 동굴 밖 세상을 말하면, 그렇게 우상을 깨는 말을 하면 믿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고 깨달은 자를 살해하기까지 한다. 브라는 당연하고 믿었던, 브라를 조신의 상징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설리는 충격이었다. 설리는 우상을 건드린 것이다.

 

왜 설리에게 불편을 느꼈을까?

막연한 믿음. 그것이 더 무서운 법이다. 그냥 당연하다고 믿고, 익숙해서 믿는다. 자연스레 견고한 고정관념이 만들어진다. 이를 관습이라 부른다. 관습은 생각의 근본이며, 판단의 원천이다. 결국 관습은 가장 강력한 가치관이 된다. 관습의 옥죄기에 답답해하면서도, 관습에 얽매여 살면서도, 누군가 자신이 지켜온 관습을 깨면, 억울해서 욕하는 진영에 합류한다. 마치 정의롭다는 듯이다.

 

브라는 기능성 옷 중에 하나일 뿐이다. 입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습관은 법률처럼 작용한다. 알레르기 반응은 형벌이다. 브라를 여성 필수품이라고 한다. 마치 과거 중국의 전족처럼, 중세유럽의 코르셋처럼, 브라를 당대여성 평가의 상징처럼 말한다. 익숙하니 당연하다고 인지하는 관습. 여기에 NO라고 말하니 불편하다. 아마 어느 남자 연예인이 하이힐과 스타킹을 신으면 욕먹을 것이다. 그런데 하이일은 원래 남녀구분이 없던 신발이다. 지금 그렇게 고착화되었을 뿐.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루이14세 - 하이힐과 스타킹

인간은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자신은 생각보다 착하고, 억울하고, 정의롭다고 믿는다. 남들은 아닌데 말이다. 자기중심적이기에 남을 쉽게 판단하고, 그래서 상처 주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자신의 착함을, 억울함을, 정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선 누구보다 크게 목소리를 낸다. 서글프게도 현실이 아닌 사이버공간에서, 공개발언이 아니라 댓글에서만 말이다. 정의의 사도가 된다. 그것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상처는 있다. 누구나 아픔이 있단 말이다. 그런데 아픔에 공감하기보단, 남의 상처를 보며 기쁨을 찾는다. 넌 나보다 더 아파야 해! 없는 상처도 만들어 헤집는다. 그런다고 위안이 되는 게 아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일반화되면서 연예인이 숨 쉴 공간은 더 줄어들었다. 숨 막히는 감시망이다. 마음이 아파도 갈 곳이 없다. 사회는 심리치료를 받으라고 한다. 최선이란다. 그러나 심리치료를 받던 아이돌이 자살한 적이 있다. 심리치료에 원망을 쏟아내면서. 유서의 일부 내용이다.

 

통증은 통증일 뿐이다.

그러지 말라고 날 다그쳤다.

왜요? 난 왜 내 마음대로 끝도 못 맺게 해요?

왜 아픈지를 찾으라 했다.

너무 잘 알고 있다. 난 나 때문에 아프다. 전부 다 내 탓이고 내가 못나서야.

선생님 이 말이 듣고 싶었나요?

아뇨. 난 잘못한 게 없어요.

조근한 목소리로 내 성격을 탓할 때 의사 참 쉽다 생각했다.

 

샤이니의 종현은 28세에 갔다. 유서에는 심리치료에 대한 원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가장 주목받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잊혀졌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치료제가 잘 못되어 있다고 그는 말했지만, 사회는 모른척했다. 잘못된 치료제는 오늘도 쓰인다.

 

종현 1주년 사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학문이다. 당연히 객관화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상처는 객관화되지만 아픔은 주관적이다. 우린 큰 상처와 작은 상처를 구분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은 오로지 개인만이 안다. 어떤 이는 팔다리가 잘려도 버티지만, 어떤 이는 손가락 흠집에도 기절한다. 오버가 아니다. 그는 그런 것이다. 객관성을 추구하는 정신분석학이 주관적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않는 이유다. 심리치료의 우선은 객관적 분석이 아니라 주관적 공감이다.

 

그런데 의사나 상담사는 너무 잘난 분들이다. 찌질함을 모른다. 아니 모른척한다. 그러니 공감은 없다. 공감하는 척만 할 뿐, 결국 지시와 훈계만 있을 뿐이다. 세상은 말야~ 또 하나의 꼰대다.

 

종현이 원했던 건 심리를 분석하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길 바랬을 뿐이다. 상처를 뒤집기보다 공감이 먼저다. 나는 행복하다는 가짜 힐링이 아닌, 마음을 터놓을 대상만 있어도 힐링이 된다. 누구라도 좋다. 연예계 종사자가 아니면 더 좋다. 익명의 상대가 더 편한 법이다. 그렇게 마음 터놓을 이가 필요하다. 모든 연예인에게 말이다. 위태로워 보이는 연예인이 한둘인가.

 

종현은 말한다.

 

무슨 말을 더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평가하지 말고, 그냥 받아주란 말이다. 넌 그렇게 사는 구나. 나와 다르지만 인정! 이렇게 해달란 말이다. 그냥 느긋하게 지켜봐주면 안되려나. 안재현, 구혜선이 이혼한단다. 그런가 보다 하면 안되려나. 어차피 잘 모르는 이들인데. 우리 좀 편히 살자. SNS 한 줄에, 사진 한 장에 널뛰기하지 말잔 말이다. 특히, 언론! 당신들이 주범이다. 설리 죽음의 절반 이상은 언론의 책임이다. 악플보다 언론 더 논쟁을 키우고, 상처를 깊이 만든다.

 

연예인은 원래 위험한 직업이다. 감정을 조절해야하는 직업이기에 그렇다. 배우만 그런 게 아니다. 가수도, 개그맨도, 모든 연예인이 그렇다. 슬퍼도 웃고, 기뻐도 울어야 한다. 싫어도 좋은 척, 좋아도 싫은 척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것이 내 마음인지 어떤 것이 내 감정인지 구분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다. 아니 마음 터놓을 이가 필요하다. 말도 안되는 억지 논리를 부리며 고집을 부려도 괜찮은 그런 상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없다. 주변에는 모두 감정을 만지는 이들만 있다. 친하다고 믿지만, 결국 거기서도 상처를 입는다. 개인적 아픔을 말하면 약점이 되고, 개인적 기쁨을 말하면 자랑이 된다. 절망이다.

 

친구에 얽매일 필요없다. 그냥 터놓고 얘기할 수만 있다면.......

우린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다. 영웅도 역적도 종이 한 장 차이다. 과한 칭찬도 과한 비난도 모두 살인 무기다. 칭찬을 부담을 주고, 비난은 절망을 준다. 그냥 지켜봐 주자. 광대가 무대에서 놀 수 있도록 지켜봐 주자. 그냥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온 광대는 그저 인간인 뿐이다. 나와 똑같은 인간.

 

설리는 당당했지만 여린 아이였다. 누구보다 용감했지만 겁이 많았다. 원래 인간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좋든 싫든 가면은 만들어지고, 나로 규정된다. 그 이중성을 알기에 남의 가면을 벗기는 것에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은 가면 속에 숨으면서 말이다. 연예인은 큰 가면을 써야 하는 직업이다. 그걸 인정해줘야 한다. 가면을 벗기지 마라. 모두 실망할 뿐이다.

 

조금만 느긋해지자. 다른 생각에, 다른 의견에, 다른 방식에 조금만 느긋해지자. 잊지 말라. 당신은 남의 인생을 판단할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다. 삶에 모범답안은 없다. 정답은 없다. 그런데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정해진 인생을, 생각을, 삶을 강요하진 말자. 우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조금은 겸허해지자. 꼰대는 나이가 아니라 생각에서 온다. 최소한 어린 꼰대는 되지 말자.

 

누구보다 용감했고 아파했을 그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