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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당 평론

<선무당 평론> 전이수의 반말에 대한 파편적 생각

<선무당 평론> 전이수의 반말에 대한 파편적 생각

 

전이수의 반말

<같이펀딩>이란 주말 프로에 전이수가 출연했다. 수식어는 화려해서 12살 천재 작가라고 한다. 그런데 그림보다 반말과 외모가 더 관심을 끈다. 12살 아이가 50이 다 된 유희열에게 거침없이 반말을 한다. 당혹스럽다는 시청자의 반응이 압도한다. 많은 댓글이 그의 사회생활을 걱정한다. 전이수의 작품이나 프로그램의 의도보다 이런 신변잡기가 화제의 중심에 선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상식적으로.......

 

그런데 상식에 대한 확신은 있으나 검증은 없다. 그저 다수가 하니까. 당연히 옳거니 하면서 따라할 뿐이다. 이런 믿음이 주류 질서가 되고, 미풍양속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때로 폭력이 된다. 현재 한국의 상식은 나이 많은 사람은 반말을, 나이 적은 사람은 존대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상식은 옳은 것일까? 아니 전통일까? 그저 최근에 만들어진 허상일 뿐일까?

 

 

반말에 대한 상식

장유유서長幼有序가 한국 사회의 상식이다. 이 유교의 관념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장유유서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30년 전만해도 한국 사회의 상식은 지금과 또 달랐다. 지금의 장유유서와 반말에 대한 개념은 전통과는 거의 상관없는 만들어진 전통에 가깝다.

 

조선시대는 모두 알다시피 계급사회였다. 당시 언어는 계급의 언어였다. 같은 계급끼리 같은 언어를 썼다. 양반네들은 존댓말을 썼다. 자식들도 결혼을 해 성인이 되면 존대를 해줬다. 반말은 아랫것에게 쓰는 말투였다. 세자가 아무리 어려도 존대를 하고,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몸종에게는 반말을 한다. 장유유서는 같은 계급끼리 통하는 매우 협소한 의미였다.

 

최소 70대 이상 어른들에게 물어보라. 동향삼년同鄕三年 타향십년他鄕十年이다. 서로 말 놓고 지내는 사이를 말한다. 친구의 기준이 이랬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으면 3년 정도 터울에 친구가 되고, 다른 지역 사람은 10년 정도가 말을 놓고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1년 차이도 엄격하게 구분한다. 한 살 많다고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또 행동해야 한다. 선배라는 이름으로. 어이가 없다.

 

사회는 계속 변하고, 예절은 계속 변한다. 1970년대 정도까지는 10년 친구라는 관념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다만 남녀사이에는 존대를 했다. 그 때 대학생들은 그랬다. 1980, 90년대까지도 대학 동기는 말을 놓고 지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재수, 삼수 상관없이 말이다. 나이가 아니라 학번이 기준이었다. 그 당시 사회 전반이 그랬다. 개인적인 부분은 몰라도 공식적으론 서열의 기준이 기수였다. 그런데 2000년 이후 나이가 기수를 압도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같은 학번 사이에서도 형, 동생한다. 지금은 그렇다.

 

또 한 가지 조선시대 양반들은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사투리는 사실 거의 반말이다. 양반들은 관화官話를 배우고 썼다.(이건 중국도 그랬다.) 관화는 관가에서 통하는 말이다. 지금의 표준말로 지배계층이 쓰는 말이었다. 신라, 고려, 조선의 중심은 경주, 개성, 서울로 다르지만, 모두 관화를 사용했기에 문제가 없었다. 왕실에서 쓰는 말은 모두 관화로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신라시대도 왕실 말은 경상도 사투리와 전혀 달랐다. 지금 존댓말도 관화에서 나온다.

 

 

군사문화와 만들어진 전통

현재의 반말을 잘 살펴보라. 한마디로 명령투다. 먹어. . . 상대의 의견은 상관없다. 지시하는 말이다. 아랫것에게 하는 말투로, 군사문화의 영향으로 강화되었다. 군사문화가 없어진지 오래라고 하지만, 사회 일부영역에서는 오히려 이상하게 강화되고 고착화되었다. 역사가 발전한다고, 경제가 발전한다고 사회 모든 분야가 저절로 발전하고 진화하진 않는다. 일부 퇴보하고 반동하기도 한다.

 

21세기에 접어든지 20여년이 지났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나이문화와 성문화는 오히려 이상하게 보수화되고 있다. 이젠 한 살 사이에 존대와 반말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마치 군대처럼. 아니 생활의 군대화다. 조금이라도 사회 질서에 어긋나면 온갖 막말이 쏟아진다. 사회는 역행하여 여성의 가슴노출뿐만 아니라 남성도 가슴노출마저 주저한다. 가끔은 엄격한 종교국가를 제외하고 한국 같은 사회가 있을지 의문이다.

 

모순에 모순. 사회 어느 한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 자유로우며, 대다수는 엄격한 도덕적 통제를 받는 이상한 사회. 고등학생이 마약을 대량 들여오다 걸리는데, 대다수는 학교 교칙하나 어길까봐 절절 매는 사회. 이상한 도덕적 잣대와 왜곡된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 그리고 통념.

 

30년 가까이 지배한 한국의 군사정권

 

조선시대 유교는 일제의 침범 이전에 죽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전통 관념 중 일부는 군사문화 그 자체인 일본문화와 결합되었고, 또 해방 후 군사정권의 문화와 결합하였다. 남성 거의 모두가 군대에 가는 상황에서 군대문화는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군대 가면 사람 된다는 말로 포장되어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으로 교육받는다. 잘못된 명령도 말없이 따라야 한다. 평등이 아니라 수식 사회가 상식이 된다.

 

 

이상한 전통. 맞담배질

군사문화가 만든 잘못된 예절의 상징이 맞담배다. 한국사회에서 선배와의 맞담배는 매우 예의 없는 짓이다. 이 전통도 군사문화가 만든 찌꺼기일 뿐이다. 예절이라 부를 수도 없는 찌꺼기다. 군대에서 후임의 군기를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이 담배를 통제하는 방법이다. 그게 사회에 흘러나온 것이다. 무식한 이들은 이게 전통이라 믿는다. 아니 거의 모든 사회가 이를 믿는다.

 

조선시대 골초로 유명한 정조 임금은 신하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제발 회의 때 담배 좀 피지 말라고. 임금과도 맞담배를 했던 조선이다. 외국인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담배엔 남녀노소가 없었다. 다 맞담배질이었다. 상식적으로 기호품인 담배에 예절을 지킨다면 다른 커피 등도 예절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세상 어느 나라가 맞담배로 예절을 찾나? 한국밖에 없다. 북한도 맞담배를 한다. 김정은 앞에서도 피우잖나. 한마디로 맞담배 예절은 한국에만 있는 이상한 관념이다. 심지어 한국 과거에도 없었다. 오로지 근래에만 있는, 군사문화가 변형된 이상한 예절이다.

 

기산 풍속도 - 담배피는 어린 여인

 

이런 굴곡된 예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굴곡된 역사만큼이나 많다. 전통은 일제 무너졌고, 독재정권으로 왜곡됐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예의 바른 집단은 의외로 바로 교회다. 군사문화식 장유유서가 가장 잘 지켜지는 지역이다. 유교와 기독교의 조합이다. 그 만큼 굴곡진 근현대 한국사다. 상식을 과신하지 마라. 예절을 맹신하지 마라.

 

 

관념의 민주화를 향하여.

한국의 민주화는 제도의 민주화였다. 군사정권이 하도 혹독하여 제도의 민주화만 하면, 관념의 민주화는 당연히 따라오리라 믿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관념은 오히려 혼란만 겪고 있다. 아니 유교의 잔재. 일제의 잔재, 그리고 군사문화의 잔재가 뒤엉켜 이상한 질서를 만들어 놓고 이를 전통이라고 한다. 헛소리다.

 

대략 1997IMF를 전후하여 사회는 물질주의가 휩쓸게 된다. 그 때부터 극존칭이 난발된다. 갑질을 양산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백화점, 음식점 등 서비스업에서 고객에게 극존칭이 당연해진다. 반말의 역작용이다. 한쪽에서는 반말의 구분이 엄격해지고, 한쪽에서는 극존칭이 횡횡한다.

 

한 살 차이면 반말을 해도 되고, 고객이면 극존칭을 해야 한다. 심지어 사물에게도 존칭이 난발한다. 방송이 큰 역할을 한다. 존칭의 난발로 만들어진 전통을 사회 질서로 고착화시킨다. 방송은 기본적으로 시청자가 기준이어야 한다. 그래서 누가 나와도 극존칭을 쓰면 안된다. 100세 넘은 시청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4,50대에게도 극존칭을 쓰고, 심지어 몇 년 선배에게도 그렇게 극존칭을 한다. 방송은 그걸 그대로 송출한다. PD는 영어만 잘할 뿐이다. 이상한 전통이 만들어지고 만다.

 

 

그래도 전이수의 반말은 이상하다.

극존칭에 대한 반동은 생겨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는 형님>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 모두 반말을 사용했다. 게스트도 나이에 상관없이 반말에 참여한다. 그들은 마치 친구처럼 편하게 말한다. 지나치게 억눌린 욕망의 분출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말이 명령투라는 점이다. . 먹어. 명령이 된다. 자요. 먹어요. 하면 좀 순화된다. 현재의 반말은 평등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군사문화의 잔재가 뿌리 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이수의 반말은 이상한 것이 된다.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로 보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의 예절을 규정할 순 없다.

 

수평적 관계라면 상호존중이 우선이다. 그런데 반말은 무시다. 애당초 아랫것에 사용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극존칭은 또 다른 의미의 반말이다. 적당한 언어 찾기가 필요하다. 반말은 아니다. 지금으론 존댓말을 기본으로 반말을 섞는 게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아이들이 쓰는 그랬다요가 더 발전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예절은 언제나 변화한다. 그것도 생각보다 급변한다. 과정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보라. 그리고 지금의 예절을 만들어 가면 된다. 인구과잉의 시대에 만들어진 예절이 출산율 걱정하는 시대에 맞을 리 없다. 장유유서라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면 앞으로 청소년은 자리 앉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각이 꼰대가 아니라면 바꿀 수 있다. 전이수는 오버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꼰대가 옳은 것도 아니다.